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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실에서 다비까지' 법정스님과 함께한 열흘…종교를 넘나든 추모물결

병실에서 길상사로, 다시 송광사로, 다시 조계산 자락의 다비장으로, 그리고 ‘소유와 무소유의 경계’를 훌쩍 넘어간 시간. 그 속에 법정 스님의 생애가 고스란히 담겼기에 열흘은 길고 길었다. 아직도 흐르는 추모객의 눈물, 스님은 이미 재가 되셨기에 열흘은 또 짧았다. ‘병실에서 다비까지’ 열흘을 다시 밟아본다. 그속에는 불교계 안팎을 겨누는 ‘법정의 메아리’가 물결치고 있기 때문이다. 5일 오후 2시였다. “법정 스님이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렸다.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 갔다. 방문객을 막는 보안은 철저했다. 병실에 들어갔다. 법정 스님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앙상한 팔과 앙상한 다리, 산소마스크를 댄 호흡을 따라 몸 전체가 들썩들썩했다. 무척 힘겨워 보였다. 법정 스님은 눈을 뜨고 있었다. 곁에 있던 상좌 스님은 “흔들리는 필체로 필담은 나누신다”고 말했다. 법정 스님은 주위 사람이 말을 건네면 고개는 끄덕였다. 병원에선 “얼마 안 남으셨다. 절에서 임종을 맞을 거면 모시고 가라”고 했다. 상좌 스님들이 “불일암으로 가시자”고 말씀을 드렸다. 법정 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불일암은 수행하는 곳이다. 이 몸으로 가진 않겠다. 내가 다시 수행할 수 있는 몸이라면 그곳으로 가겠다.” 법정 스님은 그렇게 꼿꼿하고, 철저했다. 11일 오후 1시였다. “법정 스님이 병원에서 길상사로 이동 중”이란 제보가 날아왔다. 급하게 길상사로 갔다. 일주문 뒤로 길상사 신도 50여 명이 두 줄로 서 있었다. 다들 합장한 채 법정 스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구급차가 경광등을 번쩍이며 들어왔다. 신도들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상좌 스님들과 의료진이 차에서 법정 스님을 내렸다. 이동식 침대 위에 링거를 꽂고 누운 법정 스님은 향지실(주지실)까지 50m 가량 이동했다. 취재진도 없었고, 방송사 카메라도 없었다. 카메라를 꺼내 혼자서 찍었다. 봄·가을로 법문을 전하던 법정 스님과 길상사 신도들의 ‘마지막 만남’이었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이 앞을 지나자 신도들은 합장한 채 울음을 터뜨렸다. 향지실로 들어간 법정 스님은 40분 후에 입적했다. 길상사의 종루가 길게 울었다. 종소리를 들은 신도들은 오열했다. 이유가 뭘까. 12일 오전 11시20분이었다. 길상사 언덕의 향지실에서 운구가 나왔다. 8000여 추모객이 길상사를 가득 메웠다. 수사복을 입은 외국인 가톨릭 수사도 보였고, 수녀도 보였고, 원불교 교무도 보였다. 드러나지 않은 추모객 중에는 천주교인도, 개신교인도, 원불교인도 꽤 있을 것으로 보였다. 종교의 문턱을 넘나드는 추모의 울음, 이유가 뭘까. 13일 오전 11시 전남 순천의 송광사 경내 조계산 자락에서 다비식이 열렸다. 1만5000여 추모객이 산중에 빼곡했다. 다비식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다들 ‘법정 스님의 책 구절’을 얘기했다. 그랬다. 이 거대한 추모의 물결은 책의 힘, 글의 힘, 법정 스님이 길어올렸던 언어의 힘이었다. 그 언어는 철저하게 대중의 가슴, 대중의 눈높이를 겨누었다. 사람들은 묻는다. “지난해 김수환 추기경이 선종했다. 올해는 법정 스님이 입적했다. 이런 추모의 물결이 다시 또 있을까?” 사실 법정 스님은 작가의 감수성, 예술가의 감수성으로 세상을 봤다. 그래서 그는 이 시대의 ‘문학승(文學僧)’이기도 하다. 어려운 불교적 메시지, 난해한 옛 선사의 가르침은 그의 감수성을 통과하며 일상의 언어로 되살아났다. 이건 한국불교가 뼈 속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다. “나는 깨달압네”하며 쏟아내는 한자 투성이의 ‘난수표 법어’가 얼마나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 수 있을까. 누구나의 일상을 통해 풀어내지 못하는 법어는 또 얼마나 공허한 건가. 상대의 가슴을 열어 젖히지 못하는 법문은 결코 메시지를 전하는 ‘징검다리’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짚고, 또 짚어야 한다. 길상사와 송광사에서 넘실대던 울음바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현대적 언어·대중적 감수성으로 사람들의 일상을 겨누었던 ‘법정의 눈’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불교가 그 ‘눈’에 눈을 뜨게 되는 날은 언제쯤일까. 조계종 총무원장이 바뀔 때마다 ‘불교의 현대화’ ‘불교의 생활화’를 내세우지만 ‘과거의 문자’에 갇힌 설법으로는 그 한계가 분명하다. 불교는 생명이고, 그걸 전하는 언어도 살아 숨 쉬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신인섭 기자

2010-03-16

뉴욕서도 ‘무소유’ 설파…한인들 애도

법정 스님 입적 소식에 한인 불교계가 애도하고 있다. 2000~2004년까지 법정 스님이 뉴욕에 방문했을 때마다 머물렀던 뉴욕불광선원 휘광 스님은 “몸이 안 좋으시다는 말을 듣고, 한국에 가 한번 찾아뵈려고 했는데…”라고 말했다. 휘광 스님은 14일 추모법회를 마치고, 한국 송광사를 찾을 계획이다. 11일 입적 소식을 듣고 불광선원 법당을 찾아 분향한 민혜령씨는 “한국에서 전화로 스님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면서 “몹시 슬프다”고 밝혔다. 법정 스님이 뉴욕 불교계와 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2000년. 그해 가을 뉴욕불교사원연합회가 준비 중이던 대중법회 연사로 참석하면서부터다. 그후 법정스님은 몇차례 뉴욕을 방문, 불자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법정의 아이돌, 헨리 데이빗 소로우=그 후 2001~2003년까지 가을마다 법정 스님은 불광선원을 찾았다. 일주일에서 길게는 열흘까지 머물면서 법문도 전하고, 가을 짙은 단풍을 즐겼다고 한다. 가장 먼저 법정 스님이 가보고 싶어했던 곳은 매사추세츠주 헨리 데이빗 소로우(1817~1862)의 통나무집이 있는 월든 호수. 비폭력을 주창하고, 사회의 모든 체계에 반대해 호숫가 옆 통나무집에서 은둔하면서 살았던 소로우는 법정의 ‘아이돌’이었다. 휘광 스님은 “제일 먼저 그 곳에 데려다 달라고 하셨고, 그 곳에 도착하자마자 통나무 집 앞에 서서 ‘헨리 소로우씨, 나 왔습니다’하시면서 아이처럼 기뻐하셨다”고 회상했다. 법정 스님은 2003년까지 뉴욕에 올 때마다 매번 소로우 통나무집을 들렀다. ◇자연을 즐기다=법정 스님은 불광선원 인근 세븐레이크, 베어마운틴은 물론, 캐츠킬·헌터마운틴, 매사추세츠주와 뉴햄프셔주 화이트마운틴 등 미국의 광활한 자연을 즐겼다.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에만 뉴욕을 찾아 불자들 사이에서 법정 스님은 ‘가을 스님’으로 통한다. 그 중에서도 화이트마운틴을 가장 좋아했다고. 법정 스님이 좋아하는 하얀 자작나무가 지천에 널려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휘광 스님은 “화이트마운틴 곳곳이 한국 골짜기와 비슷하다며 좋아하셨다”고 전했다. ◇포근한 할아버지=“무말랭이, 무국을 좋아하셨어요.” 불광선원 불자들은 법정 스님이 오셨을 때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공양에 공을 들였다. 갓 구운 베이글과 차 한잔으로 아침을 시작한 법정 스님은 보살들이 정성껏 차린 밥을 항상 고마운 마음으로 먹었다고 한다. 수미화씨는 “항상 공양을 준비한 우리들과도 밥을 같이 먹자하시던 ‘스윗’한 분이셨다”고 회상했다. 평소 불자들과 사진도 찍지 않을 정도로 ‘까다로웠던’ 법정 스님은 뉴욕 불자들한테만은 한 없는 자비를 베풀었다. 휘광 스님은 “일일이 저서에 사인은 물론, 사진을 위해 포즈까지 취해주셨다”면서 “아무래도 이민자들의 고통을 이해하셨던 것이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조진화 기자 [email protected]

2010-03-11

한인 불교계도 애도의 물결…'법정스님 입적', LA 12일 합동 추모 법회

한국의 큰 스님인 법정스님(사진)의 입적소식을 접한 한인 불교계가 애도에 잠겼다. 웨스턴에 위치한 고려사는 11일 오후 분향소를 마련하고 '무소유'의 법정스님을 추도하는 이들을 맞고 있다. 범경 주지스님은 "그저께 밤 9시쯤에 한국에 계신 현오 회주스님이 고려사에 전화를 해서 한국의 상황을 알려왔다"며 "한국에서는 다비식을 13일 송광사에서 열지만 LA에서는 오늘 오후 4시에 남가주 사원연합회(회장 만성스님)가 고려사에서 합동추모 법회를 열 계획"이라고 밝혔다. 법정스님은 초창기 고려사가 타운에 개원했을 때를 비롯해 여러 차례 방문한 바 있다. 범경스님은 "송광사 불일암에 계실 때 두 번 스님이 직접 만들어 주신 차를 마신 적이 있다"며 "말이 없으시고 엄하면서도 온화하신 스승"이었다고 회상했다. 남가주 사원연합회의 현일 스님(법왕사 주지)은 "60년대 봉원사에 계실 때 만났다"며 "불교계 안에서는 훌륭한 스님들이 많았지만 대외적으로 비불교인들에게 그처럼 가깝게 다가가 큰 영향력을 준 스님은 없었다"며 큰 스님을 잃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마침 한국에서 뉴욕과 시카고를 거쳐 이곳 LA를 방문 중에 비보를 듣게 됐다는 정묘스님은 "82년 행자(예비승려)때 송광사에서 법정스님에게 직접 '불타 석가모니' 교육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정묘스님은 "특히 제자를 가르치실 때는 작은 잘못도 그대로 넘어가는 일이 없이 엄격하셨다"며 스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송광사에 찾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 제자로 선택되는 수는 결코 많지 않았다고 말했다. "어떠한 명예직도 갖지 않고 오롯이 부처님의 길만을 닦아 '청정한 수도자 삶'의 롤 모델"이었다며 존경심을 표현했다. 일반 불자들도 애도에 잠겼다. 특히 김대도행 불자는 스님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감회가 남다르다. 스님이 마지막 숨을 거둔 성북동 길상사(옛 대원각 자리)를 법정 스님에게 도네이션 하도록 다리 역할을 한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김 불자는 "한국서 소식을 듣고 친분 있는 보살님과 함께 밤새도록 울었다"며 "돌아가시기 전에 잘 살고 있느냐며 안부를 물으시던 스님이 잊혀지지 않는다"며 눈시울을 적셨다. 김인순 기자

2010-03-11

'버리고 또 버렸던' 법정스님의 생애, 주옥같은 산문집…일반 국민 큰 사랑

11일(한국시간) 입적한 법정스님은 탁월한 문장력을 바탕으로 한 산문집을 통해 일반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은 '스타' 스님이다. 불자나 스님들 사이에서도 1993년 열반한 성철 스님에 이어 인지도가 높은 스님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불교의 가르침을 지키는 출가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고 산문집의 제목처럼 '무소유'와 '버리고 떠나기'를 끊임없이 보여줬다. 스님은 자신이 창건한 길상사의 회주를 한동안 맡았을 뿐 그 흔한 사찰 주지 한 번 지내지 않았다. 1932년 10월8일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스님은 28세 되던 1959년 3월 양산 통도사에서 자운 율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했다. 출가 본사 송광사로 내려온 스님은 1975년 10월부터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홀로 살기 시작했다. 1976년 산문집 '무소유'를 낸 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불일암 생활 17년째 되던 1992년 다시 출가하는 마음으로 불일암을 떠나 강원도 화전민이 살던 산골 오두막에서 지금까지 혼자 지내왔다. 스님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지난해 겨울은 제주도에서 보냈다가 건강상태가 악화하면서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식을 또렷하게 유지하면서 "강원도 오두막에 가고 싶다"고 거듭 말했다는 것이 주변의 전언이다. 스님은 평소에는 강원도 산골에서 지냈지만 대중과의 소통도 계속했다. 특히 1996년 고급요정이던 성북동의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으로 유명했던 김영한 할머니(1999년 별세)로부터 아무 조건없이 기부받아 이듬해 12월 길상사로 탈바꿈시켜 창건한 후 회주로 주석하면서 1년에 여러차례 정기 법문을 들려줬다. 법정스님은 2003년 12월에는 길상사 회주 자리도 내놓았다.

2010-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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